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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페이지 문의

()│2022-03-23 14:50:23.0│조회수: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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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과 같은 가이드를 받았습니다.

무엇이 문제 인지 잘모르겠네요... 가이드 가능할까요?

 

-----책내용----

서는 「예언자적 지성의 한계」와 「블레이크의 급진적 상상력과 민중문화」가 다소 대조적인 평가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앞선 글이 후기 시들이 비록 의미심장한 실패지만 결국 실패작이라고 단정하는 데 비해, 10년 뒤의 글은 그들 작품이 내장한 ‘급진적 상상력’ 그리고 민중문화 전통과의 깊은 연관성을 소상히 밝혀내는 데 집중한다. 이렇게 ‘예언서’ 시편들의 미덕은 미덕대로 사주는 방향으로 나가기는 했지만, “후기 블레이크의 마음은 세상을 일거에 초탈하려는 은자(隱者)나 현자(賢者)의 그것에 가까웠던 것이지 시인(詩人)의 그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예언자적 지성의 한계」 122면)라는 1974년 평문의 판정은 김종철이 평생을 두고 고민한, 불의한 세상과 맞선 ‘예언자적 지성’과 ‘시인의 마음’ 사이의 결코 간단찮은 관계를 일찌감치 제기한 것이 었다.

 

재회를 계기로 나는 그를 ‘창비’ 작업에 더 가까이 끌어들이고 싶었지만 이때 그는 문리대 선배들이 주도하던 다른 계간지의 편집위원으로 이미 합류한 상태였다. 따라서 필자로서나 적극 도와달라는 부탁만 했고 그는 흔쾌히 응낙했다. 그리하여 블레이크 논문이 실린 같은 해 가을호로 시작하여 신간 시집들에 대한 훌륭한 서평들을 썼고, 특히 『문학과지성』과의 관계를 청산한 이후로 창비의 중심 필진의 한 사람이 되었다. 이때 써낸 것이 「흑인혁명과 인간해방」(1978), 「식민주의의 극복과 민중」(1979, 제목을 『식민주의와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 프란츠 파농에 대하여」로 바꾸어『대지의 상상력』에 수록), 「산업화와 문학」(1980) 같은 굵직한 글들이다. 창비는 1980년 여름호까지만 내고 신군부에 의해 폐간되었다가 1988년에야 복간되었는데, 김종철은 잡지가 없던 기간에도 이런저런 글모음에 기고했고 복간 뒤에는 이용악론(1988), 신동엽론(1989)을 잇달아 발표했다.

 

그의 신동엽론과 관련해서는 내가 크게 미안한 일을 저질렀음을 고백해야겠다. 글은 신동엽의 20주기를 기념하기 위해 특별히 청탁했던 것인

 

 

 




┗ 관리자1│2022-03-23 15:49:38.0 가입이메일 내용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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